요원하고 비상식적이며 어색하지만, 아름답다 -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에 대한 호의는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색하지 않다. 러셀은 물론 사르트르촘스키 같이 그들의 삶에 '참여'라는 두 글자를 깊이 새겨놓은 지성인들을 예찬하는 건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재치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러셀의 찻주전자 우화에서 난 러셀을 처음 만났고, 대수학을 공부하면서 다시 만난 그의 칼같은 논리 정연함은 나도 갖고 싶은 하나의 무기 같았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악하기까지 한 복합체, 즉 종교를 바라본 그의 솔직함, 그 자체였다. 아직도 그는 사르트르와 함께 내가 큰 고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그가 먼저 말했던 무신론 대표서적을 썼던 것은 진작에야 알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그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처세나 자기관리서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친구 도비와 교보 문고를 둘러보다 만난 이 책의 첫 이미지는 그래서 갸우뚱한 호기심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금세 사회주의적인 글이라는 걸 알고서야 도비도 의아해 할 정도로 덥석 책을 구입해버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난 너무 답답했다.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이젠 실현하기엔 그간 달려온 길이 너무 멀다는 것을 난 아쉬워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이 책을 썼던 1932년에는 러시아나 프랑스에서 새로운 구조의 사회에 조금의 희망을 찾아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에겐 열심히 잉여가치를 생산해내는 기계로서의 행복이 가득할 뿐이다. 인간 '소외'는 이미 100년을 넘게 연구되고 있지만, 우린 이 시장주의, 재화 중심적인 사회의 톱니바퀴를 거스를 어떤 자그만 방법조차 하나 배운 적이 없다. 요컨대, 새로운 계몽의 시대가 오지 않는 한 연봉으로 직업 우위를 결정하고, 어떻게든 연금으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해 보려는 수억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던 흐름을 역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 멀어진 사회. 그가 말하는 사회는 너무나도 요원하고, 비상식적이며, 어색하지만, 아름답다. 그건 그만큼 나도 사회에 타협하며 살고 있다는 걸 말해주기도 하고, 어색한 건 상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로화된 행복을 좇고 있다는 것 역시 질타해준다. 그래서 러셀의 백과사전 같은 박식함에 대한 경탄은 온데간데없고, 난 이런 순진한 상상력도 없다는 걸 기분 나쁘게 느낄 뿐이었다.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버트런드 러셀송은경

가능한 한 위계, 계급이 없는 곳을 만들자

난 얼마 겪어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강렬하지 못하게 느꼈기 때문에 '군기'라는 것이 낯설고 어색하다. 그런 걸 흉내 낼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막상 해보려 한다 해도 자신 역시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틀에서 보면 상명하복의 관계는 군인의 계급 구조에 명확히 설정된다. 이런 일반적 이미지의 군인이란 낙인을 거스르는 건, 군인이란 자격지심을 위안하는 도구가 되어준다.

첫 후임들이 왔을 때, 난 나와 똑같은 시간을 쉬게 해주고, 나와 똑같은 시간만큼 여가 시간도 갖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는 과거 몇 년간 '막내가 해야 할 일' 제목으로 목록화되었던 일들 일부는 내무반장[1]인 나도 공유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후임들에게 시킨 일이면 꼭 나눠서 같이 하고, 같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최소한 후임들이 일하는 중엔 나도 쉬고 있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중에 한 후임이 내 통솔의 키워드를 평할 때 '뭘 하든 평등하게'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난 일종의 구호 하나를 되새겨오고 있다. '가능한 한 위계, 계급이 없는 곳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나도 굉장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 일단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는 우리의 대표지위가 서열이 정해진 군인이기 때문에 내 원칙에는 '가능한 한'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외력이 후임들이 더 일하도록 작용하기 때문에, 굳이 숫자를 쓴다면 내가 후임들과 아무리 평등을 외쳐봤자, 후임들이 나보다 20%는 더 일을 할 것이다. 업무 하달 구조상 직원들은 잔일을 후임들에게 먼저 시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 후임들이 선임인 내가 후임들을 잘 챙겨준다는 식으로 이 글을 잘못 읽는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사람이란 게 자신에게 주어진 건 일단 기본이므로, 난 후임들에게 내 능력 이상을 챙겨줄 수 없고, 그런 면에선 섭섭한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는 텐진 가쵸의 충고는 사람이 자연적으론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임이 틀림없다.

요컨대 난 나보다 후임인 세 명에게 '선·후임'의 역할 의식보다는 '동료'라는 의식을 심어주고 싶다. 어차피 군대 문화, 나중 가서는 술자리 얘깃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고 과장된 폄훼를 하면서까지, 난 후임들이 군대적인 권력을 갈망할 출구를 막을 것을 권장한다. 이런 건 내가 무슨 성인군자나 되거나, 마르크스가 그랬듯 계급투쟁엔 인식 있는 부르주아가 앞장서야 한다고 해서 그런 걸 몸소 실천한다고 하기엔 어쭙잖다. 일단 누나가 내게 말해주었듯,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해서 손해 보더라도 혼자 하는 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내 성격인 것 같다. 또 후임들의 일을 도와주면서도 나눠할 수 있는 다른 일은 내가 혼자 맡아 하다 보면 후임들의 사기가 더 진작된다는 간단한 처세로도 이용하고 있다.

후임이 내게 지적해줬지만, 군대에선 어느 때든 만능키처럼 먹히는 명제가 under control이다. 국방에 관해선 반듯한 통제 하에 군인이 있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실효적인 의미일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확실한 건 적어도 군대에 대해선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면서도, 난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날 뭔가 특이한 사람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핸드폰을 배치 2주 만에 쓰게 허락해준, 이틀 만에 낮잠을 자게 해준, 종종 빨래를 해주는 선임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그저 일 열심히 했던 동료로 기억 받고 싶다.

  1. 내무반 단위로 병사들의 일상생활을 보살피고 이끌어 가는 책임자 []

TC2WP 그간 휴업 일지?

얼마 전 USB를 잃어버린 후로 SVN에 커밋하지 않은 채로 저장해놨던 소스들을 다 잃어버려 TC2WP 개발에서 잠시 손 땠어요. 흑. :cry:

가장 최근 리비전에서 다시 시작해야되는데, 그간 해놨던 작업들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나네요. 뭐 어떻게든 다시 시작은 되겠죠.

블로그 2년

이곳에 첫 글을 쓴 후로 2년이 흘렀다.

모든게 0에서 시작한 이 블로그의 현재 구독자수는 97명. 하루 방문객은 대략 400명. 글은 미공개 글을 포함해 510개. 그간 달린 댓글은 1526개. 받은 트랙백·핑백은 173개. 스팸 댓글은 31373개.

인기없는 블로그지만, 하나같이 공들여 쓴 글 500여개를 생각하면 만만한 블로그도 아닌 듯. ㅋㅋ

주적이 그렇게 쉽게 보이더냐

조갑제 曰, "'광우, 미친, 죽여, 너나 먹어'라는 말을 두 달간 계속하면 진짜로 미친다"고 한다. "좌파 소탕, 좌파 척결, 좌파 청소, 친북 세력"이라는 말을 인생 내내 하면 노망이 든다. 이런 글이나 지리는 할아버지는 버스비를 70원이라고 하는 아저씨 만큼이나 시민 집단과는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다. 아쉽게도 이런 노망은 현재까지 밝혀진 해독제가 없다.

난 무신론자라는 정체성 덕분에 사탄이라는 말을 이미 들어본 적이 자주 있다. 기독교는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선물이 있으며 야훼 앞에서 모든 기독교인이 평등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평등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은 사탄이 된다. 그들은 오염되었고, 더러우며, 얘기가 통하지 않고, 정복해야 할, 이겨내야 할 대상이 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빨갱이-김홍도, 서경석-, 난동꾼-이문열-, 천민-주성영-, 사탄의 무리-조용기[1], 추부길-.[2] 아무리 조갑제가 좌익은 자충수로 망한다고 했다지만, 이런 저질 극우는 항상 대상 설정을 통해 무식함을 드러낸다. 세상의 구도는 선과 악, 정의보수와 친북좌파, 찬성과 반대, 정의와 배후세력, 신도와 불신자, 천국과 지옥. 무슨 2진법적 인간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다. 와중에도 그들 모두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 중이다.

난 이번 시위가 너무 좋다. 개중엔 확성기를 끄고, 구호를 되찾자고 성토하는 소리, 예비군으로부터 소외와 위계를 느끼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하며 참여하고 싶다는 소리, 시위의 진화적 센스를 유감없이 보여준 신호등 시위, 비폭력이라는 단어에 숨겨진 가짜 평화 장치에 대한 인식.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만큼의 아름다운 음색이 나온다. '폭력적 시위'라는 뛰어난 압축적 이름 짓기를 볼멘 소리로 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기대보다도 더 많은 음색이 튀어나온 이번 일이 난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이런 시위를 보고 무슨 축구 응원이나 하는 것처럼 시민들이 생각없이 몰려들고 있다는 사람은 사회를 걱정하는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다. 군홧발로 밟고 방패로 찍는 경찰과 버스를 끌어내려는 시민의 모습은 직함 하나 차이다. 강경 진압과 과격 시위의 차이는 주체의 직함 하나 차이다. 어려울 때 도움이 되겠다는 아이러니한 경찰청의 광고가 전경 버스 옆켠에 붙어있었다.

한편, 실천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 군인이라고 적당히 빼고,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난 휴머니즘보다는 내 개인적인 안위를 돌보고 있었다. 아. 시위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난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할 자신이 없었다. 당장 의료 민영화가 되고 난 후 폐병을 하나 얻어봐야 이 때를 후회할 거고, 당장 쇠고기를 먹으면서도 불안해봐야 이 때를 후회할 거고, 당장 내 자식이 우열반에 들어가서 주옥같은 책도 안읽고 영어 공부 하고 있어야 이 때를 후회할 거다. 사람은 좀. 아무튼 좀, 그렇다.

  1. 조용기 목사는 이 동영상부터 보아야 한다. http://www.mgoon.com/view.htm?id=1498676 []
  2.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625003857#none []